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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그날에 대해 묻다." "베트남 전쟁은 단순 전쟁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전쟁" "북한의 러-우 전쟁 파병과 한국의 월남전 파병은 다르다" "32만 5,517명이 참전한 대한민국의 첫 해외 파병 전쟁" 박준영 대학생 기자 2025-03-26 18:00:01
61년 전, 베트남으로 향한 그들-참전용사들이 들려주는 전장의 기억 1964년,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을 결정하고 비전투병력을 시작으로 1965년에는 전투병력 파병을 포함해 32만 5,517명의 병력을 보냈다.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제 평화를 위해 참전했지만, 사람들은 점점 이 전쟁을 잊어만 갔고 일부는 학살자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올해로 파병 61주년을 맞아, 조기동·권준희 참전용사님을 만나 전장의 현실과 그들이 겪은 생생한 경험을 들어보았다.

[한국미래일보=박준영 대학생 기자]


[사진= 중앙 기준 왼쪽 조기동 참전용사님 오른쪽 권준희 참전용사님]


조기동 참전용사님 인터뷰


Q. 월남전 파병 당시 이름과 나이, 부대 이름을 말씀해주세요. 



A. 저는 조기동이라고 합니다. 베트남 파병 당시 나이는 23살이었고, 부대 이름은 백마부대 29연대 1대대 4중대 1소대 소속이었습니다.



Q. 월남 파병은 대부분 징집으로 인해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징집 당했을 때의 과정과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나요? 



A. 제가 당시 복무하고 있던 부대가 의정부 근처에 있는 덕정리에서 복무했어요. 그런데, 이때 김신조 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구파발 북간전성에 출동을 나가는 등 굉장히 긴장감이 고조되던 시기였어요. 


 그러다가 6월달에 제가 중대 행정병에게 농담으로 “월남에 파병이나 갈까?” 이러면서 혼잣말을 했는데, 당시 일병이던 중대 행정병이 이걸 상부에 보고를 한 거예요. 그렇게 저는 차출돼서 베트남으로 파병을 가게 되었어요. 


 특히, 제가 파병을 가게 되었을 때 저랑 고향이 같고 바둑도 같이 두고 잘 챙겨주신 친했던 중대장님이 있었는데, 제가 파병을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걱정도 많이 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많이 챙겨줬는데 배신한다면서 저에게 미움을 사셨어요. 


 그렇게 주내 사령부에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고향 친구가 태권도 조교를 하고 있었어요. 당시에는 쌀밥이 귀해서 대부분 보리밥을 먹었는데, 제가 베트남에 파병을 간다니까 그 친구가 쌀밥을 가져와서 저한테 먹으라고 건내주는거예요.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라는 곳으로 훈련을 갔어요. 여기에서 베트남 정글을 비롯해 베트남에 대한 교육을 한 달 동안 받았어요. 이곳에서 한 달 간의 교육이 끝나고 춘천에서 청량리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청량리에 도착해서 15분간 쉬었는데, 이때 부모님이 베트남으로 가기 전에 저를 보겠다고 기차역으로 찾아온 거예요. 이때 들은 생각이 부모님을 더 이상 못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부등켜 안고 꼭 살아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그렇게 저는 부산으로 갔어요. 


 당시 부산에 도착했을 때 부산항 3부두로 갔었는데, 살면서 보지 못한 정말 큰 미군 소유의 배가 눈 앞에 있는 거예요. 이 배에 5천 명 정도 탑승해서 베트남으로 가는데, 탑승할 때 제가 속해 있는 백마부대는 해병대와 같이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베트남에 가기 위해 13박 14일 동안 배를 타고 갔어요. 


 그렇게 13박 14일 동안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이 베트남의 나트랑이라는 곳이었어요. 나트랑은 바다가 얕아서 큰 배를 타고 항구까지 가지 못하고 바지선을 타고 항구까지 가야 했어요. 그렇게 내려서 도착한 부대가 백마부대 29연대였고, 이곳에서 배정해준 곳이 1대대 4중대 1소대였습니다. 


 특히, 저는 배치 받은 곳에서 3분대 분대장을 맡으라고 지시를 받았어요. 제가 있던 곳이 98고지였는데 완전 허허벌판이었어요. 그래서 방어하기에 굉장히 좋은 지역이었어요. 이곳에서 오후 6시부터 12시까지 혼자서 경계 근무를 서고 맞교대를 하게 되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이곳에서 하사로 복무하고 있는 내무반장이 있었는데, 그분이 제 고등학교 선배님이셨어요. 그래서 그 하사분이 저보고 힘들게 근무 서지 말고 무전병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무전병을 하게 되면 경계 근무를 서지 않아도 됐어요. 그런데, 제가 연대에서 들었던 얘기 중에서 베트콩이 소대장과 무전병을 먼저 죽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지형이 정글이다 보니 아군끼리 통신이 매우 중요했어요. 그래서 베트콩이 무전병을 죽여서 통신을 끊기게 하는 것이 베트콩의 주요 목적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무전병을 하는 게 무서웠는데, 선배님이 계속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무전병으로 베트남에서 복무를 하게 되었어요. 


 베트남에서 한 달 정도 적응을 하고 이제 작전을 나가게 되었는데, 저는 무전병이다 보니 사령부나 사단에서 받은 정보를 좌표가 찍힌 곳에 전달하는 매복 형식의 작전을 많이 진행했어요. 저희가 사단 사령부에서 받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어두운 새벽에 1,500고지 산을 걸어서 올라갔어요. 4박 5일 정도 되는 식량, 물, 수류탄, 총 그리고 무전병이니 무전기를 매고 올라갔어요. 보통 하루 종일 올라가도 200m 정도 밖에 못 올라가요. 그리고 한국 산은 정상에 올라갈수록 나무의 크기가 작아지는데, 베트남은 올라가도 나무의 크기가 똑같았어요. 


 매복 작전이었기에 중대급의 규모 있는 병력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소수의 인원만 갔는데, 종종 F-4팬텀 전투기가 산에 폭탄을 떨구거나 105mm 포 사격을 하는데, 이러한 오인 포격 및 사격으로 인한 죽을 위협과 베트콩과의 교전 등을 각오하고 항상 작전을 수행했어요.



Q. 월남 파병 중에 적군을 포로로 잡아낸 경험이나 포로를 목격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생활이 궁금합니다. 



A. 제가 베트남에서 17개월 정도 복무를 했는데, 베트콩을 포로로 두 번 정도 잡아낸 적이 있어요. 제가 고지에서 내려오다가 갑자기 나무 찍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는 밑에 차단로를 배치했는데, 베트콩이 뭐하고 있는지 보니까 계곡에서 큰 솥에 작업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때 차단로를 배치하러 간 분대장이 경상도 사람이었는데 목소리가 컸었어요. 그래서 쌀자루를 매고 가던 베트콩이 한국어가 들리니까 가지고 있던 총으로 한 발 쏴서 한국군이 있다고 신호를 보낸 거예요. 그 총 소리를 듣고 저희는 거기에 있던 베트콩 중 한 명의 다리를 쏴서 포로로 잡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생포한 그 포로를 연대에 후송시켜서 정보들을 알아냈어요. 그렇게 정보를 바탕으로 들은 움막 같은 시설들을 다 없애고 뒤지고 했는데 초간소도 안 나왔어요. 


 그리고 베트콩이 다 총을 가지고 있던 게 아니더라고요. 두 명이 있으면 그 중에 한 명이 총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월맹에서 1,000명이 내려오면 미군한테 걸리면 몇 백 명 죽고, 남베트남군한테 걸리면 거기서 또 몇 백 명 죽는데, 실질적으로 살아서 남베트남에서 활동하는 베트콩은 300~400명 정도밖에 안됐어요. 


 그리고 베트남에서의 생활은 보통 저희가 작전을 갔다 오면 휴양소와 바닷가에서 일주일 정도 쉬다가 다시 복귀하는 방식으로 근무를 했어요. 



Q. 베트남 파병 근무 당시에 가장 두렵고 무서웠던 게 뭐가 있으신가요?



A. 제가 베트남에서 무전병으로 복무를 했고 무전병이 베트콩의 우선 타겟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무전병이 제일 어렵고, 무섭고 힘들어요. 그리고 베트콩이 나무가 Y자 모양으로 갈라진 곳에다가 총구를 올려두고 쏘는데, 총 소리가 한 번 들리면 아군 한 명이 무조건 죽었어요. 그렇게 쏘고 도망가도 정글이고 땅굴로 숨으니까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무전병이다 보니 항상 불안했어요. 무전병을 가장 먼저 죽이니까 총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트라우마와 언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같은 정신적 트라우마가 항상 있었어요. 


 제가 베트남에서 17개월을 복무했는데 항상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 그리고 같은 고향 동네에서 파병 간 친구들이 죽고 그러다 보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강하게 들었어요. 


 그리고 처음에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13박 14일 가야지 베트남에 도착한다고 했잖아요.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가는데, 큰 배라도 출렁거리면 충격 여파가 크니까 배에 타고 있던 전우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배를 타고 있어도 바다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불안했어요. 



Q. 베트남 전쟁 당시 작전 수행에 있어 현지 기후나 지형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특히 현지에 적응하면서 어려웠던 것이 무엇이었나요? 


A. 베트남 날씨는 건기철과 우기철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우기철에는 매일 비가 오고, 건기철에는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날씨가 굉장히 더웠어요. 


 건기철에는 신기한 게 군화를 일주일 간 신고 있어도 발에서 냄새가 안 났어요. 그리고 날씨가 덥다 보니까 입고 있던 옷은 항상 땀에 젖어 있었어요. 


 우기철에는 비가 굉장히 많이 오고 자주 왔어요. 그리고 월남에서는 물이 굉장히 귀했어요. 그래서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물통에 빗물을 담아서 그 물로 샤워하고, 땀에 젖은 옷을 빨래를 하고 그랬어요. 



Q. 전쟁이 끝나고 본국으로 귀국하고 나서 국가에서 준 보상이 있을까요? 


A. 저희가 2024년 기준으로 월 42만 원을 받고 있는데, 내년 2025년에는 3만 원 올라서 45만 원 정도 받아요. 그래도 턱없이 부족하죠. 현재, 서울시에서 15만 원 정도 주고 있고, 내년에는 만 80세 이상이 되면 5만 원을 더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노원구, 도봉구, 강북구, 성복구 같은 몇몇 구에서는 돈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고 있어요. 강남 같은 경우에는 10만 원씩 지원해주고 있고, 지방에서도 20만 원 정도 지원해주는 곳도 있다고 얘기를 들었어요. 시, 구마다 지원해주는 규모가 다 틀려요. 그런데, 아직까지 저희 노원구는 지원금을 못 받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이를 해결하려고 구의회에 수없이 다녀왔는데, 지원금을 받으려면 10조 2항 조례 내용인 이중 수급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즉, 서울시랑 구청에서 이중으로 돈을 받는 게 안된다는 거예요. 그래도 다행인 게 2024년 11월에 법안이 개정돼서 이중 수급이 삭제되었어요. 그래서 아마 내년부터 3~5만 원 정도 지원받을 것으로 예상돼요. 


 그리고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에서 하나가 유가족 혜택이 아무것도 없어요. 돈은 못 받더라도 보훈 병원은 이용해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이게 지원이 안 되고 있어요. 보훈 병원은 병원비가 굉장히 싸요. 그래서 일반 병원에서 10만 원 나올 비용이 보훈 병원에서는 1만 원 정도 밖에 안 나와요. 


 저도 고엽제 피해자이기도 하고 당뇨약, 혈압약 등을 처방받아서 먹고 있는데, 각 구마다 저희에게 의료적 혜택을 주는 지정된 병원이 있어요. 그런데, 진료비는 지원을 받지만 약국에서 처방받는 약 값은 그대로 지불하고 있어요. 반면, 보훈 병원 같은 경우에는 진료비, 약 값 모두 지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참전자뿐만 아니라 유공자분들에게도 따로 이러한 혜택 같은 게 지원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지원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 상황이에요. 



Q. 베트남 전쟁 파병 당시에 가장 길다고 생각하는 기억에 남는 하루가 있을까요? 


A. 박쥐 4호 작전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요. 당시 제가 속해 있던 29연대가 박쥐 부대였는데, 이때 저희 부대 연대장이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어요. 보통 사단 작전을 한번 시행하면 예산이 많이 들어가서 성과가 좋아야 했어요. 그런데, 사단 작전 성과가 그리 좋지 못했어요. 


 월남 파병을 온 장군들 대부분이 진급 목적으로 많이 왔는데, 저희 부대 사단 작전이 성과가 좋지 못하니까 사단장이 연대 작전을 시행하라고 명령해서 정비하고 연대 작전에 들어갈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 이상하게 예감이 너무 안 좋은 거예요. 그리고 평소와는 다르게 배가 너무 아파서 위생병을 찾아갔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서 후송되었어요. 


 그때 작전에 통신병 사수였던 저 대신 조수인 안 상병이 갔어요. 이상하게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전혀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그리고 그 다음날 중대 본부에서 전화가 왔는데 안 상병이 전사했다는 거예요. 


 안 상병은 사실 전투에 데리고 가지 않고 대민 지원에만 보내고 그랬는데, 안 상병이 저한테 계속 전투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월남에 왔으면 작전 한번 해보고 고향에 가야 가족, 친구, 친척에게 해줄 이야기가 있을 거 아니냐라면서 하도 부탁을 해서 제가 소대장에게 보고하고 결국 중대장이 이를 승인했어요. 


 이건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8군 능선에서 쉬고 있는데 숨어 있던 베트콩이 소대장 옆에 있던 무전병 조수인 안 상병한테 총을 쐈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중대 본부에서 안 상병 사망 소식과 관물 챙기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안 상병 관물을 챙기다가 옷을 만지는데 너무 죄책감이 드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그때 계속 안된다고 반대했더라면 작전에 나가서 않아서 죽지 않았을텐데, 지금도 그 안 상병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온양 사는 22살 안 상병만 생각하면 지금도 꿈에 나오고 그래요. 그래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겠더라고요. 


 

Q. 전쟁을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젊은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A. 제가 6.25전쟁 때 6살이었는데,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건지 6살인 그때도 기억이 생생히 나요. 제가 경기도 여주 간안읍에서 태어났는데, 거기서 80리를 걸어서 충북 음성군 냉동면으로 피난을 갔어요. 당시 피난 상황, 전쟁의 참혹함을 어린 나이였음에도 다 기억해요. 


 그만큼 전쟁이라는 게 무섭고 비참한 거예요. 근데 요즘 젊은 사람들을 보면 전쟁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거 같아요. 특히, 안보 의식이 없는 거 같아요. 지금도 뉴스를 보면 현 상황이 정말 답답해요. 


 저희가 이렇게 늙어도 다시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면 총 들고 나가서 싸울 거예요. 이 생각은 저뿐만 아니라 여기있는 베트남 참전 회원들 다 같은 마음이에요. 


 그리고 제가 군 생활할 때는 복무를 36개월 정도 했는데, 18개월로 확 줄이고 이런 상황을 보면 우리가 휴전 국가인 걸 모르는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병력도 모자른 판국에 복무 개월 수까지 이러니까 정말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우리 주적인 북한은 군 복무를 10년을 하는데, 우리는 18개월만 한다니까 비교가 안돼요. 군대에서 18개월 복무를 한다고 해도 뭘 제대로 배울 수가 없어요. 특히 요즘 현대전으로 무인화 되고 있다고 해도 전쟁이 나면 보병은 반드시 필요한 겁니다. 


 현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제가 복무했던 36개월만큼은 아니더라도, 군 복무 개월 수 증가와 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안보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현대 사회 속에서 개인 이기주의도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서로 돕고 정을 나누던 나라였는데, 지금은 개인만 잘 살면 되는 이기주의로 변하면서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서먹해진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권준희 참전용사님 인터뷰


Q. 참전이라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베트남 전쟁 참전이라는 것은 단순히 전쟁터에 간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대한민국과 남베트남과의 관계에 의해서 가게 된 거예요. 한국전쟁 당시 UN에서 국제결의안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여러 나라들이 한국을 도와줬는데, 그때 남베트남도 한국을 지원해주면서 한국과 남베트남과의 관계가 형성되었어요. 


 그리고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남베트남에서 먼저 한국에게 지원 요청을 보냈었고, 한국은 이를 계기로 미국과 연관 지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하게 된 거예요. 


 특히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 주요 목적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참전하게 된 것이고, UN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관해 UN군 파견은 안했지만, 참전을 해달라고 몇 국가들에게 부탁했어요. 이를 받아들인 국가로는 미국, 한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대만, 라오스, 캐나다 등 수많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병력 파견과 인도적 지원을 해줬어요. 즉,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 미국만이 참전한 전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남베트남이 북월남에게 무너지게 되면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 되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다시 말해, 공산주의 국가가 남베트남을 점령하게 되면 캄보디아를 비롯한 남은 국가들을 전부 통일하지 않는가 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했어요. 


 이를 냉전 시대 때 미국이 가장 우려했고, 한국전쟁 당시 남베트남이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도와줬으니까 한국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도와준 남베트남에게 보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 파견을 결심하게 된 거예요. 



Q.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파병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북한군 파병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A. 한국이 월남에 파병을 간 것과 북한이 러-우 전쟁에 파병을 간 것은 완전히 달라요. 한국은 파병의 개념에서 간 것이고, 북한은 용병 개념으로 간 거예요. 한국은 베트남 파병 당시에 군복도 한국 군복을 입었고, 지휘 체계와 한국군에게 있었어요.  


 반면, 북한 파병은 군복도 러시아군 군복으로 입었고, 지휘 체계도 러시아군 지휘 체계를 따르는 것을 일부 언론을 통해 알 수 있죠. 그리고 한국의 주된 파병 이유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갔지만, 북한은 파병을 간 주된 이유도 명확히 무엇 때문에 간 건지 알지 못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한국이 역사 교육을 할 때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을 잘 다루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파견을 가게 된 주된 이유는 월남과의 관계와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서 간 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한국의 반 만년 역사 동안에 32만 5천 명 정도의 대규모 병력이 파견 간 것은 역사상 없었던 일이고 이정도의 병력이 해외에 나가서 전투를 한 것은 대단한 일인데, 이를 숨기려 하고 교과서에 제대로 나와 있지도 않고 월남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는 현 상황이 한탄스러워요. 


 이렇게 베트남 전쟁에 대해 역사적으로 제대로 교육을 시키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월남 파병에 대해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파병을 단순 돈벌이 목적으로 갔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더라고요. 


 월남 파병한지 이제 60년이 지났는데, 파병의 주요 목적인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관한 내용은 교과서에 한 줄도 나와 있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 한국이 파병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 두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당시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주한미군 2개 사단을 빼서 월남에 투입하려고 한 것이 미국의 작전이었어요. 


 만약 한국을 지켜주던 2만 명 이상의 미군이 한국에서 빠져나가게 된다면 안보적 공백은 물론이고 2차 한국전쟁 또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두 번째는 대한민국의 국방력을 위해서 가야 했어요. 당시 한국이 북한보다 국방력이 약했어요. 우리가 열세인 상황에서 미군 2만 명과 미군 소유 재래식 장비가 빠져나간 상황에서 북한군이 내려오면 국방력이 약한 우리 상황으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었어요. 


 만약 한국이 월남에 파병을 가지 않았으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월남 파병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어요. 그래서 제가 바라는 건 돈벌이 목적으로 간 것이 아닌 이러한 배경이 있었고, 우리의 목적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였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기록되고 젊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Q. 베트남 파병을 통해 한국이 얻은 이득은 무엇인가요? 


A. 월남 파병에 대한 봉급을 당시 달러로 30~40불 정도 받았는데, 저희는 그 돈을 사용할 수가 없으니까 필수품을 구매하는 돈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국가가 아닌 가족에게 보냈어요. 이 돈이 달러로 갔기 때문에 가족은 이를 생활비로 사용하고 사용한 달러는 국가 외환 보유고에 쌓이게 되었어요. 


 그리고 우리가 월남에 들어가고 나니까 전쟁에 대핸 물자 공급이나 수송에 대한 필요성에 의해서 기업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기업이 성장하게 되고, 무역 수지가 생기게 되었어요. 


 미국에서도 한국군이 파병하는 대신에 한국군 재래식 장비 전력 등 군 무기들을 미국제로 많이 바꿔줬어요. 예를 들면, 당시 다른 나라에 판매하지 않던 F-4팬텀 전투기를 우리에게 주었고, M48 패튼 전차, 미사일, M16 소총 등 많은 군사적 기술을 지원 받았어요. 이 지원을 토대로 우리나라 국방력이 발전하게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산 무기화 정책에도 큰 도움이 되었어요. 


 당시 북한보다 평균 GDP소득 낮았던 대한민국이 지난 8년 8개월 간 월남전 파병 덕분에 엄청난 군사력 발전과 파병을 통해 벌어온 67억 불로 포항제철을 비롯해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리고 중공업 국가로 가기 위한 SOC 기반 산업을 발전시키게 된 것입니다. 



Q. 월남전 파병 참전용사로서 국가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실까요? 



A. 월남전 참전용사 평균 소득을 보면 110만원 밖에 안 돼요. 국가에서 대우해줘야 할 사람들이 현재 굉장히 가난하게 생활하고 있어요. 하지만, 돈도 돈이지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훈’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에 국가 안보는 보훈이라고 생각해요. 보훈이라는 것은 국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들에 대해서 나라가 대우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 보훈을 제대로 지켜줘야 나중에 국가에 어려운 상황이 생기거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국가에 대한 보훈적 신뢰를 바탕으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거예요. 


 만약,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갔다 온 사람한테 금전적, 사회적 대우도 안해주고 살인자라고 비방하고 손가락질 한다면 누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누가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가겠어요. 


 모든 대한민국의 남성이 의무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고, 병장 봉급도 200만 원으로 올라도 젊은이들이 “돈 줘도 안간다”라는 소리가 왜 나오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나라에서 대우와 보장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온다고 생각해요. 


 대우와 보장이란 무엇이냐면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 그것이 바로 보훈이에요. 다시 말해, 보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200만 원으로 올려준다고 해도 다들 안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병 봉급을 200만 원으로 올려주는 것보다도 먼저 국가유공자 즉,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나라에서 지원을 해주면 ‘아 내가 죽더라도 내 나라가 우리 부모님은 먹고 살게는 해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을 정도로 보훈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법으로 참전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을 만들어 놨는데,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1차적으로 이걸 지켜주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2차적으로는 우리도 미국처럼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탑 같은 것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미국 같은 경우에는 2차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한 군인들의 이름을 모두 기념비에 세겨주는데, 우리는 기껏 해봐야 현충원 같은 곳에 묘지 몇 곳 인장하는 게 전부에요. 월남에서 전사한 우리 5천 99명의 한국군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국가에서도 이들을 기리는 기념탑을 건설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Q. 월남전에 대한 전쟁 기록이나 미디어를 통해 보면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학살하는 장면들이 종종 보이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우선, 월남전 같은 경우에는 전선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베트콩은 언제나 일반 시민들과 섞여 있었어요. 예를 들어, 어떤 한 가정을 보면 큰아들은 월맹군이고 둘째 아들은 베트콩 그리고 셋째 아들은 월남군인 경우가 있었어요. 신기한 게 밤이 되면 모여서 같이 밥 먹고 해가 뜨면 다시 본인들 부대로 돌아가더라고요. 


 우리는 전투도 전투이지만, 베트콩 100명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양민은 무조건 살려야 된다는 것을 지시를 받았어요. 그리고 이 지시가 파병 당시 저희의 지켜야 할 모토이기도 했고요. 즉,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베트콩을 죽이러 간 것보다 양민을 구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한 마을에 베트콩들이 있다는 정보가 취합이 되면 저희가 사전에 전투를 하기 전에 마을 주민들에게 퇴거 해달라고 사전 통보를 해줬어요. 이런 식으로 전쟁을 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그리고 처음부터 월남에 전투 병력이 들어간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대민구호사업을 목적으로 비전투 병력인 외과 병원 즉, 의료병이 먼저 들어갔어요. 그리고 당시 베트남 마을이 사회 기반 시설이 잘 안되어 있으니까 거기에 공병대를 보내 집도 지어주고, 다리도 만들어주는 등 주민들의 삶이 향상될 수 있게 도와줬어요. 그리고 이후에 전투 병력이 들어갔는데, 이렇게 주민들과의 신뢰가 쌓이니까 그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누가 베트콩이라고 제보하는 등 일종의 심리전을 진행했어요. 


 즉, 우리는 미디어에서 보이는 것처럼 무차별적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 아닌 주민들을 돕고 신뢰를 쌓으면서 이를 바탕으로 베트콩과의 전쟁을 진행했어요. 그리고 미디어에는 한국군이 학살자로 그려지는데, 오히려 베트콩들이 본인들 물자 보급이 좋지 못하니까 마을 주민들의 물품을 약탈하고 이에 반항하면 민간인을 죽이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저희는 이를 막기 위해 각 마을에 군을 배치해 민간인을 보호하는 작전을 했어요. 


 그런데 미디어에서는 저희를 민간인을 죽이는 학살자로 보이게 하니 저희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바로잡고 싶은 심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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