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래일보=이재원 기자] 가상현실(VR)이 다시 한 번 기술 뉴스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올해 들어 주요 빅테크 기업과 게임 플랫폼 업체, 그리고 학계가 잇따라 새 기술과 장비를 내놓으면서, VR은 더 이상 ‘실패한 대중 기술’이 아니라 차세대 컴퓨팅 인터페이스를 둘러싼 치열한 실험장이 되고 있다. 특히 최근 이슈는 헤드셋 성능 경쟁을 넘어, 공간 컴퓨팅·업무용 활용·촉각 재현 등 인간 감각 전반을 다루는 과학·공학의 융합에 가깝다.
애플은 자사의 혼합현실 헤드셋 ‘비전 프로(Vision Pro)’를 올해 대폭 손질하며 다시 시장에 불을 붙였다. 10월 공개된 업그레이드 모델은 애플의 최신 M5 칩을 탑재해 연산 성능과 배터리 효율을 끌어올렸고, 착용감을 개선한 듀얼 니트 밴드와 함께 새로운 공간 앱들을 더했다. 운영체제인 비전OS 26 역시 사진에 생성형 AI를 적용해 깊이감을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공간 장면’ 기능, 사람 얼굴을 3D 아바타로 구현하는 ‘페르소나’의 자연스러운 표정 개선, 한 공간에서 여러 사용자가 같은 3D 화면을 공유하는 기능 등을 포함한다. 애플은 이를 ‘공간 컴퓨팅(spatial computing)’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며, VR/AR 기기를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기기가 아니라 업무·협업·디자인까지 아우르는 고급 컴퓨팅 도구로 포지셔닝하고 있다.
반대편에선 메타와 마이크로소프트가 손을 잡고 보다 실용 중심의 접근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메타의 헤드셋 운영체제 ‘호라이즌 OS’ 업데이트(v81)를 통해, 윈도우 11 PC 화면을 메타 퀘스트 3에서 여러 대의 초고해상도 가상 모니터로 띄워 쓸 수 있는 ‘Mixed Reality Link’ 기능이 정식 출시됐다. 사용자는 PC에 전용 앱을 설치한 뒤 헤드셋을 페어링하면, 시야를 둘러싸는 초광폭 곡면 모니터 환경을 구현하고, 최대 12개의 앱을 동시에 띄워 작업할 수 있다. 여기에 헤드셋을 두 번 두드리거나 버튼을 눌러 주변 현실을 즉시 비춰주는 풀 패스스루 모드까지 지원하면서, 가상 모니터와 현실 공간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가상 사무실’ 실험이 본격화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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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웨어 측면에서도 새 변수가 등장했다. 밸브(Valve)는 최근 ‘스팀 프레임(Steam Frame)’이라는 독립형 VR 헤드셋을 공개하며 2026년 출시를 예고했다. 퀄컴 스냅드래곤 8 Gen 3 기반 칩셋과 스팀OS를 탑재한 이 기기는 1안(eye)당 2160×2160 해상도의 LCD 패널, 팬케이크 렌즈, 인사이드아웃 트래킹을 갖췄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점은 모듈식 디자인과 개방성을 앞세워, 스팀 덱·PC와의 연동을 전제로 설계됐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무선 동글을 통해 PC 게임을 고주사율로 스트리밍할 수 있고, 안드로이드 앱을 사이드로드 하거나, 프로톤(Proton)·FEX 기술로 x86 윈도우 게임까지 돌릴 수 있다. 메타 퀘스트 3처럼 대중적인 소비자용 제품이 VR 보급의 ‘양’을 확장해왔다면, 밸브는 PC 게임 생태계와의 호환성을 내세워 ‘질’과 ‘자유도’를 끌어올리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연구 현장에서는 인간 감각의 한계에 도전하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메타의 리얼리티 랩스 연구팀은 올해 컴퓨터그래픽 학회 시그래프(SIGGRAPH) 2025에서 초광시야각(ultra-wide FOV)과 초고해상도를 목표로 한 새로운 VR 헤드셋 프로토타입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기존 소비자용 기기보다 훨씬 넓은 시야 확보와 실제 눈의 초점 변화(조절)까지 고려한 광학 설계를 통해, 머리를 돌리지 않고도 주변 환경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하고, ‘현실과 거의 구분이 안 되는’ 수준의 화질을 지향하는 것이다.
촉각 재현도 중요한 연구 축이다. IEEE VR 2025 학회에 제출된 한 연구는 교육·훈련용 VR에서 실제 사물을 만지는 듯한 촉감을 구현하기 위해, 사용자의 손 움직임과 접촉 압력에 맞춰 반응하는 햅틱 인터페이스 모델을 제안한다. 이 같은 기술은 산업 현장 훈련, 수술 시뮬레이션, 복잡한 기계 조작 교육에서 실수의 위험을 줄이는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한편 의료 분야에서는 공포증 치료를 위한 VR 노출 요법, 화상 환자의 통증 완화를 위해 차가운 가상 환경을 보여주는 치료, 뇌졸중 환자 재활 훈련 등 다양한 임상 실험이 진행 중이다. 단순한 ‘몰입형 콘텐츠’가 아니라 신경과학·재활의학과 결합한 치료 도구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흐름은 VR 기술이 세 가지 축에서 동시에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는 헤드셋의 ‘기계적 완성도’ 경쟁이다. 더 가볍고, 더 고해상도이며, 배터리는 오래 가고, 착용감이 좋아야 한다. 애플의 M5 칩 탑재 비전 프로와 메타의 퀘스트 라인업, 그리고 밸브의 스팀 프레임 발표는 모두 이 축에서의 스펙 경쟁이자, 각자가 어떤 사용 시나리오를 우선순위로 보는지 드러내는 지표다. 둘째는 플랫폼·생태계 경쟁이다. 애플은 비전 프로를 자사 기기·앱과 강하게 묶어 ‘프리미엄 공간 컴퓨터’로 만들려 하고, 메타와 마이크로소프트·밸브는 비교적 개방형 생태계를 통해 PC·클라우드·모바일 앱까지 연결하는 전략을 택했다. 셋째는 인간 감각과 인지에 대한 과학적 이해다. 초광시야각 광학, 시선 추적과 포비에이티드 렌더링, 햅틱 피드백, 치료·재활 활용까지 VR은 인체공학과 뇌과학의 실험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2025년의 VR은 더 이상 “언젠가 올 미래 기술”이 아니다. 이미 일부 기업은 가상 모니터와 공간 협업 도구를 실사용 단계에 올려놓았고, 병원·학교·제조업체는 훈련과 치료, 설계에 VR을 투입하고 있다. 다만 여전히 남은 과제도 분명하다. 무거운 가격표, 장시간 사용 시 피로감, 콘텐츠 부족, 개인정보·시선 데이터 보호 문제 등은 해결해야 할 과학기술·사회적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헤드셋 업그레이드와 연구 결과들은 VR이 다시 상승 곡선을 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임 기기’로 시작한 헤드셋이 ‘공간 컴퓨터’와 ‘감각 실험 장치’로 진화하는 과정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리고 누가 이 새로운 인터페이스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을지, 앞으로의 과학·기술 뉴스가 지켜볼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