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래일보=황하영 대학생 기자] 생성형 인공지능(AI)은 이제 콘텐츠 제작 환경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기업들은 AI를 활용한 광고와 콘텐츠를 잇달아 선보이고, 창작자들 역시 새로운 도구를 활용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최근 광고 시장에서는 역설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AI를 배제했다는 사실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브랜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침대브랜드 시몬스가 만든 브랜드 캠페인 시리즈 '라이프 이즈 컴포트' 중 하나. / 사진=시몬스
지난 4월 침대 브랜드 시몬스는 ‘라이프 이즈 컴포트’라는 브랜드 캠페인 영상 5편을 유튜브에 올렸다. 철저하게 AI 사용을 거부한 채 AI 생성 이미지 대신 아날로그 화면 질감을 택한 영상은 시장의 이목을 끌었다. AI가 단시간에 콘텐츠를 대량 생산하는 시대에 업계는 왜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의 노동과 비정형적인 가치에 다시 눈을 돌리고 있을까.
■ 소비자가 찾는 것은 완벽함보다 '맥락'
앞선 1편에서 살펴봤듯 생성형 AI가 일상화될수록 소비자들이 AI 콘텐츠에 느끼는 가장 큰 장벽은 '진정성의 부재'다. 실제로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2월 실시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2.4%는 "AI 광고는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답했다. 기술적 완성도보다 콘텐츠에 담긴 인간의 창작 의도와 맥락을 더 중요한 가치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 변화는 AI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소비문화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 Z세대 사이에서는 AI 기능이 탑재되지 않은 구형 애플 아이팟의 중고 거래량이 전년 대비 약 50% 증가했다.
유튜브에 '사이버덱(Cyberdeck)'을 검색한 결과 화면. / 사진=유튜브 캡처
또한 사용자가 직접 조립하는 아날로그형 소형 컴퓨터 '사이버덱(Cyberdeck)' 문화도 확산 중이다. 블룸버그는 이를 단순한 복고 열풍이 아닌, 기술 과잉 속에서 개인이 주체성을 지키려는 'AI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의 소비 현상으로 해석했다.
나아가 미국 뉴욕에서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대면 소통을 지향하는 대규모 축제 ‘서머 오브 러드(Summer of Ludd)’가 개최되는가 하면, 스마트폰 대신 피처폰(일반 휴대전화)을 사용하며 직접 만나 독서와 대화를 나누는 10대들의 자발적 모임 ‘러다이트 클럽(Luddite Club)’이 글로벌 전역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AI가 만들어낸 효율성 중심의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의 개입과 날것의 연결을 복원하겠다는 움직임이다.
■ AI 기술 과도기가 가져온 ‘기술적 실업’ 위기
AI를 둘러싼 소비 심리의 변화는 노동시장에 대한 불안과도 맞닿아 있다. 악시오스(Axios)와 해리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Z세대의 42%는 AI가 자신의 취업 기회와 임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했다. 이는 밀레니얼 세대(33%), X세대(39%), 베이비붐 세대(37%) 등 타 세대보다 높은 수준이다.
실제 산업 현장에서도 AI는 단순한 업무 보조를 넘어 조직의 구성원으로 확대되고 있다. SK텔레콤은 최근 AI 에이전트에 사번과 직무를 부여해 구성원과 함께 일하는 업무 체계 도입을 발표했다. AI가 '도구'를 넘어 '동료'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역할은 어디까지 대체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현실이 되고 있다.
지난 24일 열린 ‘제5회 사람과 디지털 포럼’ 현장. / 사진=황하영 기자
이 같은 변화는 지난 24일 열린 '제5회 사람과 디지털 포럼'에서도 주요 화두로 다뤄졌다. 이 자리에 나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부편집인 세라 오코너는 자막 번역가 사례를 소개하며, AI 도입 이후 번역가의 역할이 '직접 번역'에서 'AI 결과물을 검수하는 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코너 부편집인은 "인간이 창작의 첫 단추를 직접 꿰지 못하면서 창작이라는 도전 정신 자체가 흐려지고 있다"며 "정확성만 기계적으로 검토하는 일은 노동자를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생산라인 노동자처럼 느끼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고용 불안과 반(反) AI 정서가 19세기 기계 파괴 운동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손은지 숙명여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는 이를 과거 산업혁명기의 러다이트 운동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고 분석했다.
손 교수는 "과거 러다이트 운동이 생존권을 위해 기술 자체를 파괴하려 했던 저항이라면, 지금은 AI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AI와 차별화되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다시 평가하는 과정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현대의 소비자들이 기술 자체를 거부하기보다 인간이 만든 결과물을 선택하고 소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표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 기술이 평준화될수록 브랜드가 되는 것은 '사람'
기업들도 이러한 소비자 심리와 노동 현장의 변화를 브랜드 전략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기사 서두에서 소개한 시몬스의 '라이프 이즈 컴포트' 캠페인 역시 단순 AI 비판을 넘어, 실제 촬영과 제작 과정을 통해 브랜드 철학과 장인 정신을 강조하며 주목받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예(Ye)가 새 앨범 '불리(Bully)'에 AI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진= X(@kanyewest)
이러한 시도는 팝뮤직과 출판 등 글로벌 문화산업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하는 추세다. 지난 3월 세계적인 힙합 아티스트 예(Ye)는 새 앨범 '불리(Bully)' 커버에 'No AI'를 명시하며 자동 음정 보정이나 AI 작곡이 아닌 인간이 직접 만든 음악임을 강조했다.
같은 달 영국의 대형 출판사 페이버 앤드 페이버(Faber & Faber)도 일부 서적에 "인간이 쓴 책(Human Written)"이라는 표시 도입을 시작했다.
과거에는 당연시되던 '인간의 창작'이 이제는 기술 평준화 시대 속에서 차별화된 품질을 보증하는 핵심 가치이자 하나의 독자적인 브랜드 언어로 부상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숙명여대 자유전공학부 손은지 교수는 "역설적으로 AI 콘텐츠가 범람할수록 인간이 만든 콘텐츠의 희소성을 차별화 요소로 활용하는 포지셔닝 전략이 작동하게 된다"며 "장인이 만든 명품이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처럼, AI 시대에는 인간이 직접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새로운 프리미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석암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역시 기술 평준화에 따른 시장의 양극화를 전망했다. 윤 교수는 "AI가 만든 콘텐츠와 인간이 만든 콘텐츠를 기술적으로 구분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면서도 "당분간은 일반 콘텐츠를 AI가 대량 생산하고, 인간의 개입과 창작 과정 자체가 가치가 되는 프리미엄 콘텐츠는 사람이 담당하는 방식으로 시장이 양극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물론 이러한 흐름이 미래 세대에도 지속될 것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손 교수는 세대가 바뀌면서 AI 콘텐츠에 대한 윤리적 이질감이나 거부감도 점차 완화될 것이라 보았다. AI가 더욱 자연스럽게 인간의 감정과 표현을 구현하게 되면 '휴먼메이드'의 의미 역시 달라질 수 있다는 여지다.
윤 교수 역시 "AI 기술이 발전해 인간이 만든 콘텐츠와 사실상 차이가 없어지는 시점이 오면, 대중이 '누가 만들었는가'에 지금처럼 계속 관심을 둘지는 의문"이라고 짚었다.
이처럼 지금의 '휴먼메이드' 열풍은 AI를 거부하는 일시적인 선언이라기보다, AI가 일상화되는 기술 전환기 속에서 인간 창작의 가치를 다시 구별하려는 과도기적 현상에 가깝다. 다만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수용 방식이 변화하는 만큼, '휴먼메이드'를 바라보는 기준 역시 앞으로 계속 새롭게 정의될 것으로 보인다.
공동 취재: 황하영, 김서현, 고하경 대학생 기자





